호모 레지스탕스


이달 초쯤인가. 대학교 동아리 선배로부터 문자가 왔다. <호모 레지스탕스>라는 책을 보내주겠다며 주소를 문자로 찍어달란다. ‘공짜 책인데 나야 땡큐’라는 생각에 냉큼 주소를 찍어 보냈다.


책이 온다는 걸 잊을 만한 시간이 흐른 뒤였다. 퇴근을 하는 나에게 와이프가 책이 한 권 도착했다고 했다. 선배가 보내준다던 그 책이었다. 책 표지를 들춰 저자 소개를 보니 7명의 공저자 중 한 명이 책을 보내준 선배였다.


나는 법을 하나도 모르는 법대생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아직도 피고와 피고인의 차이에 대해 정확하게 모른다. 형법에 나오는 실체적 경합, 상상적 경합을 구별하지도 못한다. (비싼 등록금 들여 대학 졸업시켜주신 우리 부모님께 죄송할 따름이다) 누군가 왜 법을 잘 모르냐고 물으면 “자연법주의자”라며 설레발을 칠 뿐이다.


그런데 웃기게도 법학과 새내기 시절, 나는 ‘법률운동’이라는 걸 해보려고 했다. 그래서 당시 총선시민연대 활동 등으로 언론의 집중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진보적인 법조인의 상징으로 떠오른 박원순 변호사를 만나기 위해 무턱대고 참여연대를 찾아가기도 했다.



책을 보내준 선배는 이름도 딱딱하기 그지없는 법률운동을 해보자며 새내기 시절 내가 들어간 동아리를 꾸린 장본인이었다. 당시 내가 속했던 그 동아리의 모토가 아직도 기억이 난다. ‘진보적 전문가 집단을 향한 끊임없는 모색과 실천’ 모호한 듯 하면서도 지향이 분명히 담겨져 있지 않은가.


이후 나는 진보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싶어 하는 욕망과 법률가라는 사회적 명망을 놓지 않으려는 욕망이 교차한다고 판단한 법률운동으로부터 다소 거리를 두게 됐다. 이 생각은 특히 서준식 선생이 쓴 <옥중서한>을 보며 더 굳어졌다. “법은 세상을 바꾸기보다 묶어둔다”는 선생의 말이 선명하게 내 마음 속에 아로새겨졌다.


우여곡절 끝에 나는 기자가 됐고 선배는 ‘진보적 전문가 집단을 향한 끊임없는 모색과 실천’을 위해 변호사가 됐다. 선배는 참여연대 공익법센터 운영위원으로 활동하며 고민의 끈을 계속 이어온 모양이었다. 그 성과물의 일부가 <호모 레지스탕스>라는 책에 담겨 있다.


대학 시절 당장 내일 혁명이 일어날 것처럼 말하던 일군의 선배들은 ‘평범한 사회인’이 됐다. 선배는 그 일군의 선배들보다 ‘선명’하진 못했지만 자기가 가야 할 길을 준비했고 지금 그 길을 조금씩 걸어가고 있는 것 같다.


운동이 그저 추억 혹은 안주거리가 되는 세상에서 ‘체제 내적이든 아니든, 개량이든 아니든’ 대학 시절 품었던 비전을 일관되게 좇는 건강함을 선배가 계속 유지했으면 한다. 그러고 보니 ‘개량’이라도 제대로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게 더 문제인 것도 같다.

'김기자의 찌질라이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호모 레지스탕스  (3) 2011.01.28
Posted by 개도야지
 용진님, 부럽삼!


신세계 정용진 부회장이 “이분 분노가 참 많으시네요”, “아무리 왼쪽에 서 계서도 분노는 좀 줄이도록 하세요. 사회가 멍듭니다” 등의 트윗을 나우콤 문용식 대표에게 날렸다. 대기업의 ‘횡포’ 때문에 주변상권 다 붕괴시킨다는 문 대표의 비판에 대한 대응은 온데간데 없고 ‘왼쪽에 서 계신 분’의 ‘싸가지 없는’ 반말에 대해서만 목소리를 높였다.


어떻게 보면 단순한 설전일 수도 있다. 또 반말이라는 태도 문제가 포개져 논점이 흐려진 ‘치고받기’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정 부회장이 상대의 태도를 문제시하는 지점에서 중요한 논점이 불거졌다. 대표적인 한국의 재벌가 인사가 분노를 바라보는 가치관 말이다. 분노해야 할 상황에 처하지 않고 어려움 없이 살아온 정 부회장에겐 분노라는 건 참으로 황당하고 촌스러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왜 분노를 하는가. 반말하지 않고 예의를 지키면서 ‘합리적’으로 이야기하면 될 일을...


정 부회장의 말이 맞다. 분노라는 멘털리티만으론 세상을 바꿀 수 없다. 분노는 자칫하면 자기 연민으로 이어져 스스로의 힘을 빼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노는 ‘다행스럽게도’ 자기 연민으로만 이어지진 않는다. 물론 자기 연민의 과정을 거칠 때도 있지만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는 시각을 갖게 하기도 한다. 파업 현장이 노동자들에겐 최고의 ‘학교’가 되는 일이 적지 않다. 힘 있는 자에겐 ‘떼쓰기’로 보이는 과정이 왼쪽에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겐 스스로를 긍정하는 기회가 되는 셈이다.  


정 부회장의 말처럼 우리 사회가 멍든 것이 과연 분노 때문일까. 정말 우리 사회가 멍든 건 이 분노가 구조적으로 해소되지 못하고 누군가에 의해 꾹꾹 눌러져 왔기 때문이 아닐까. 또 분노의 목소리가 세상에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촌스러운 분노는 ‘없이 사는’ 콤플렉스에 뒤덮인 ‘좌파’의 전유물이 맞을 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이 촌스러움과 투박함이 사회를 멍들게 한 게 아니라 건강하게 바꿔왔다는 점이다.


Posted by 개도야지
[사회]“약자 편에 선 죄, 박래군을 구속한다”
2010 02/02위클리경향 861호
ㆍ용산참사 대책위 공동집행위원장 추모집회 주도 혐의 구치소 수감

소설가가 되고 싶은 청년이 있었다. 청년은 연세대 국문과 재학 시절 교내 문학상을 받았을 만큼 글쓰기에 재주가 있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좋아하던 청년은 어느새 흰 머리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중년이 됐다. 활동가로 불리는 그는 소설 대신 성명서를 쓰는 삶을 살고 있다.

박래군 용산범대위 공동집행위원장은 지난 1월 11일 불법집회 주도 등 혐의로 명동성당 앞에서 연행됐다. 박 위원장은 경찰차에 타기 직전에 범대위 관계자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연합뉴스


박래군 용산참사 범국민대책위원회(용산범대위) 공동집행위원장(50)이 지난 14일 또 구속됐다. 20여 년 동안 인권운동을 해 오며 숱하게 경험했을 구속이지만 수인(囚人)이 된다는 것은 언제나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는 10개월 가까이를 창살 없는 ‘감옥’에서 지내야 했다. 지난해 3월 용산참사 추모집회를 주도한 혐의로 사전구속영장이 발부된 뒤 순천향대병원·명동성당 영안실에서 수배생활을 해 왔다. 그는 장례·보상을 위한 협상이 지난해 말 타결되고 희생자들의 삼우제가 끝난 지난 1월 11일 이종회 용산범대위 공동집행위원장, 남경남 전철련 의장과 함께 경찰에 자진 출두했다. “열사들이 돌아가신 남일당 건물에 다시 가보지 못해 한스럽다. 씩씩하게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긴 뒤 경찰차에 오른 그는 현재 서울구치소 독방에 갇혀 있다.

현장 활동 16년…‘분신’ 박래전 친형
박 위원장도 용산참사 유가족들처럼 가족을 잃는 아픔을 겪었다. 1988년 6월 당시 숭실대 인문대 학생회장이던 동생 래전씨는 “광주는 살아 있다”고 외치며 학생회관 옥상에서 분신했다. 대학 시절 노동운동에 뛰어든 그는 동생의 시신을 수습하고 전국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유가협) 사무국장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열사’의 장례를 치르며 그는 ‘장의사’로 불렸다. 

1994년엔 인권운동사랑방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인 인권운동가로서의 길을 걸었다. 2002년 경기 평택시 사회복지시설 에바다 농아원을 정상화하기 위한 싸움을 벌이다 비리 재단에서 퍼부은 똥물을 뒤집어쓰기도 했고, 2006년엔 평택 대추리에서 미군기지 확장 저지운동으로 두 차례 구속되기도 했다. 장애인, 이주 노동자, 양심수, 복지시설 수용자 등 사회적 약자들의 인권이 침해되는 현장엔 언제나 그가 있었다.

박래군 용산범대위 공동집행위원장이 지난해 9월 8일 명동성당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에 용산사태 해결을 촉구하고 있다. |김영민 기자


박 위원장과 함께 활동한 이들은 그를 “물불 안 가리는 사람”이라고 입을 모았다. 인권 현장이 있으면 물불을 안 가리고 뛰어드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인권운동사랑방 명숙 활동가는 “싸움이 있는 현장에 가보지 않으면 안달이 나는 사람”이라고 전했다. 박 위원장은 순천향대병원 영안실에서 숨어 지낼 때 “명색이 활동가인데 현장에 가보지 못하니 너무 답답하다”고 말했다. 홍석만 용산범대위 대변인은 박 위원장이 매일같이 갇혀 지내야 하는 것을 많이 힘들어했다고 전했다. 제법 ‘운동판’에서 경력이 쌓인 그이지만 경력, 직관을 내세우기보다 현장을 중요시한다는 게 지인들의 전언이다. 명숙 활동가는 “현장을 중요시하는 성향이 아직도 그의 인권 감수성을 지켜주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박 위원장과 같은 시기에 인권운동사랑방에 들어간 최은아 활동가는 “호불호를 강하게 고집하기보다 이견을 통 크게 아우르는 힘이 있어 주변에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고 귀띔했다.

박 위원장은 한국 사회에서 이론적으로 가장 급진적인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데에는 가장 ‘급진적’이다. 어린이 교양잡지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김규항씨는 “대중으로부터 호응받지 못하는 데에 아랑곳하지 않고 끝까지 낮은 곳에서 싸우는 사람이 박래군”이라면서 “장의사라는 별명을 얻은 것도 언제나 현장에 자기 몸을 위치시켰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의 연세대 국문과 후배인 나희덕 시인은 ‘작가선언 6·9’가 펴낸 <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참사역입니다>에 실은 글에서 박 위원장에 대한 흠모의 메시지를 담았다. “졸업 후 누구는 언론인이 되었고, 누구는 교사가 되었고, 누구는 학원강사가 되었고, 누구는 국회의원이 되었고, 누구는 주부가 되었고, 누구는 출판사 직원이 되었다. 박래군 선배는 어떤 생업도 없이 사회적 약자들의 생존권과 인권을 지키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살아왔다. 모두가 꿈꾸었지만 끝내 가지 못한 길을 한 사람이라도 제대로 그리고 변함없이 걸어가고 있다는 것이 못내 자랑스러우면서도 안쓰러웠다. 졸업 후에 그를 몇 번 만나지는 못했지만 나는 그를 우리 사회의 정의를 잴 수 있는 척도로 여기고 있다.”

시를 좋아하던 대학 동기는 국회로 갔지만 박 위원장은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지난해 12월 출간된 <그 삶이 내게 왔다>(인물과사상사)에 ‘인권운동, 나의 영원한 숙제’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글을 통해 자신이 생각하는 의리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화상당한 열사들의 시신, 그 장렬한 죽음의 마지막 순간, 의문사한 이들의 사진으로 남은 주검의 끔찍함들, 그리고 비통한 장례식과 장례투쟁…. 그때 생각했던 것이 죽은 자와의 약속이었다. 산 자들과는 이런저런 인연으로 살아가면서 약속을 바꿀 수도 있지만 죽은 자와의 약속은 그럴 수가 없다. 다만 지켜야 할 뿐이다. 그 죽음 앞에서 맹세했던 일들, 그 순간의 뜨거운 눈물과 함께 다짐했던 일들, 목울대가 아프도록 울면서 마지막 이별 앞에서 했던 약속들, 그것은 지켜야 한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의리다.” 그는 죽은 자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의리를 지키기 위해 지난해 1월 20일 인간답게 살기 위해 망루에 오른 철거민 5명이 화마에 휩싸이자 용산참사 현장으로 달려갔다.

아내와 두 딸 응원 속 인권운동 외길
박 위원장이 오랫동안 인권운동의 현장을 지킬 수 있었던 데는 가족들의 힘이 컸다. 그가 2006년 평택 대추리에서 특수공무집행방해 혐의로 구속되자 그의 아내 정종숙씨는 판사에게 탄원서를 썼다. 정씨는 탄원서에서 “인권활동가 박래군은 아내를 존중하고 아낄 줄 아는 남편이고, 아이들로부터는 정신적 지주란 믿음을 얻고 있는 아빠”라면서 “아이들 아빠를 풀어 주십시오. 남편이 집에 돌아와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 줄 수 있게, 그가 이 세상 그늘진 곳에서 햇볕을 드리우는 소중한 일을 할 수 있게 해 주시길 간곡히 청합니다”라고 말했다. 고등학교 2학년, 중학교 2학년인 두 딸도 아버지를 응원해 준다.

지난해 12월 31일 박 위원장은 명동성당 영안실에서 기자와 만나 “혹시 재판에서 1년 이상의 실형이 나오면 소설을 한번 써 보려 한다”며 웃었다. 하수상한 세월이 그로 하여금 소설 대신 성명서를 쓰는 삶을 ‘강요’하고 있지만 그는 이미 자신의 삶으로 누구보다 멋진 소설을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회부·김지환 기자 baldkim@kyunghyang.com>

Posted by 개도야지